일상다반사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2021. 2. 11.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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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는 미얀마의 정치인, 외교관이다.

1947년 6월에 암살된 아웅산 장군과 킨 치 전 인도 대사의 딸로 미얀마의 수도 랑군(현 양곤)에서 태어났다.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은 1947년 버마 독립을 6개월 앞두고 암살당했다.

아웅산 장군은 독립운동가, 정치인, 군인이었다.
아우산 수치는 델리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학위를 받고 옥스퍼드대학교 세인트 휴스 칼리지 정치철학경제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 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 대학에서 만난 3살 연하의 마이클 아리스와 결혼했다.
마이클 아리스는 부탄, 티베트, 히말라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하여 글을 쓰고 강연하는 역사가이면서 대학교수였다.
아웅산 수치와 마이클 아리스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다.  
남편인 마이클 아리스는 1999 년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53번째 생일에 전립선 암으로 사망했다. 

201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강연하는 아웅산 수치

미얀마는 본래 버마였으나 1989년 군사정권이 국명을 미얀마로 바꾸었다.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하여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하였으나 1962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군부통치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군부가 통치하는 사회주의 독재국가가 된 것이다.
2021년 2월 1일의 군사쿠데타 이전에도 실질적인 군사독재 정권이었다.
2008년 군사정권 때 만들어진 미얀마 헌법은 아웅산 수치처럼 배우자가 외국인일 경우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은 군부에 대해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국방부 장관도 군부에서 지명하게 되어 있는 참 희한한 나라다.
상원과 하원으로 되어 있는 미얀마 국회의 국회의원의 25%는 선거에 의하지 않고 군부가 지명하도록 되어 있다.
아웅산 수치는 국가 고문이면서 외교부 장관이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던 국가 고문이던 장관이던 군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나라에서 무슨 권한이 있었겠는가.
그동안 외부세계에서 로힝야족 학살에 대하여 아웅산 수치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비판했던 일부 단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아웅산 수치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탈피하고 자유주의자가 되어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일부 단체들이 아웅산 수치에게 로힝야족 학살의 책임을 덮어 씌워서 매장시키려고 했던 건 아닌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더구나 미얀마의 로힝야족을 제외한 다른 소수민족들은 로힝야족에 대하여 비판적이며 2021년 2월 1일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로힝야족의 지도자는 아웅산 수치를 지지한다고 발표까지 했다.    
 
아웅산 수치는 영국에서 대학교수인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알콩달콩 살다가 1988년 아웅산 수치의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귀국하여 군사통치에 반대하는 집회(8888 항쟁)에 참석하면서 버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1988년 9월에는 국민 민주연맹(NLD)이라는 중도좌파 정당을 설립하고 아웅산 수치가 대표가 된다.
2016년 아웅산 수치는 국가 자문위원회 위원과 외무 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얀마는 군부가 거의 모든 분야를 통치하는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버마 군부는 선거에 불복하면서 2020년 11월 버마 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2021년 2월 1일 군부의 쿠데타로 아웅산은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구속되어 있다.

아웅산 수치의 연설 중 하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연설이다. 
이 연설은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이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참고로

아웅산 수치는 본인의 이름을 아웅산수찌라고 표기해달라고 요구했다.

수치라는 표현은 한국에서 수치스럽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버마에서는 성명 표기 시 띄어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아웅산수찌라고 표기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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