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국민의 손에 쫓겨난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2021. 3. 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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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 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김해 김 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라도 전주이고,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다.

이승만

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朴春兼)의 딸 음죽 박 씨(박승선)와 결혼하여 1898년 외아들 이봉수를 낳았다.

외아들 이봉수가 1906년 디프테리아로 죽자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은 이승만에게 이혼하라고 했고 이승만은 이혼했다.

손자가 병으로 죽었는데 왜 이혼하라고 했으며 그렇다고 이혼하는 건 뭐냐?

박 씨 부인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1899년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 퇴위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5년 7개월 간 한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독립협회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서재필 등의 개화파 주도로 만들어지고 서대문에 있던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뜯어 내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기도  했다.

 

 

1904년 - 1910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한반도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본인은 체포당할까 두려워 미국으로 도망가서 미국에 살면서?

 

1908년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면서 미주 한인들이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으나 이승만은 살인범의 재판에 통역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1919년 3월 3일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담에 제출하려고 시도하였으니 실패하였다.

3.1 독립선언 이틀 후에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제출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1919년 3월 21일 

연해주의 대한 국민의회(노령 임시 정부)에서 국무경(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한인회의에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4월 16일 이승만은 미국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하여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1919년 9월 6일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1925년 3월 23일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의결해 대통령직에서 면직시키고 곧바로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비판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윤봉길의 의거를 좋게 평가했다.

이승만 본인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평가도 오락가락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제헌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1952년

전쟁통에 이승만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대거 탈락하자 6.25 피난처인 부산에서 경찰과 헌병을 동원하여 국회를 포위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 불법으로 개헌한 친위쿠데타였던 것이다.

이때의 개헌을 발췌개헌(拔萃改憲)이라고 하는데 이승만이 주장하는 대통령 중심제와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는 의원내각제를 발췌하여 만든 짬뽕 개헌이라서 발췌 개헌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때부터 누더기가 되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이라는 자가 이런 짓이나 했으니 오늘날 나라가 이 꼴이지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1954년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하여 조직폭력배 이정재와 부하들을 국회에 투입시켜 놓고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의결정족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법 개헌이었던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네.

 

1960년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러 4.19가 일어났고 시위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면서 시위군중을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시위가 격렬해지자 결국 자진 사퇴하고 하와이로 도망갔다.

하와이에서 살다가 하와이에서 죽었지만 한국에서 가족장으로 초상치고 서울 현충원에 매장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헌법을 뜯어고치고 그것도 부족하여 부정선거까지 일삼은 이런 사람을 국부라고 부르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정치인은 정치 행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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